[필진] 선생님, 제가 그 녀석 아비입니다
선생님께 보내는 공개서한
안녕하십니까? 바위도 물러질 더위에 방학 없이 보충수업이다, 특강이다 연일 애 많이 쓰십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70년대는 에어콘은 고사하고 교실에 선풍기도 없어서 저나 친구들 모두 땀띠 났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시절보다야 환경이 월등히 좋아졌지만 선생님들의 고단함은 줄어들지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남을 가르친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의 범주에 머물러도 쉽지 않은 일인데 하물며 인성까지 골격을 갖추도록 지도하려면 진정 어버이 이상의 고뇌가 따를 것입니다. 또한 열악한 근무환경과 수업 이외의 잡무까지 치러내시는 선생님들을 보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비장함마저 느껴집니다. 당연히 그만한 각오가 있었으니 교단을 선택하셨을 겁니다. 교직에 계신 분들께 자식 맡긴 부모로서 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얼마 전 저녁상에서의 일입니다. 아내가 평소와 다르게 표정이 굳어있고 무척 불안한 모습이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저녁상에서 그날 이야기를 서로 나누고 아이들 문제도 상의하곤 합니다만 어쩐지 대화가 겉돌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 있느냐고 물었지만 아내는 영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한참 후에 말하기를 큰 아이가 학교에서 선생님께 심하게 맞았다는 겁니다. 어떻게 알았느냐 했더니 같은 반 친구가 겁이 나서 자기 엄마에게 전화를 했고 그 엄마가 아내에게 연락을 한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어느 어미와 마찬가지로 아내는 아이들을 끔찍하게 생각합니다. 워낙에 덤덤한 남편과 살아서인지 몰라도 아이들 바라보는 눈길을 보면 샘 날 지경입니다. 그런 아내가 아들이 머리가 길다는 이유로 심하게 맞았다는 소리를 남에게 들었으니 충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정작 자신은 군밤 한 대 때리고도 온 종일 후회하는 심성인데 말입니다. 동네 자모회 여럿에게도 창피한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지역 외고에 다니는 아이들이니 나름대로 자부심도 있고 학업에 대한 열의도 대단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그날도 학원에 갔다가 한 시 넘어 집에 왔습니다. 아내는 평소처럼 기다리고 있었고 저녁상에서의 울컥하는 마음이 가라앉지 않은 저 역시 새벽출근도 잊은 채 애써 덤덤한 척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녀왔다는 아이의 인사를 듣고 잠시 뒤 아이 방에 가보니 다 큰 녀석이 바지 내리고 엎드려 있고 아내는 흐느끼며 아이 엉덩이에 약을 바르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 가장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피멍 든 아들 엉덩이와 아내의 눈물이 해일보다 더 큰 힘으로 제 가슴을 후려치며 지나가는 느낌이었습니다. 은결들었을 아내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습니다. 피멍 든 형 옆에 세상모르고 잠든 둘째도 안타까웠습니다. 녀석도 어느 날인가 저리 끔찍한 모습으로 귀가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이 엉덩이의 보라색 자국들이 구렁이처럼 제 목을 조이고 있었습니다.
마음 다잡고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맞았느냐 했더니 머리가 길어서 그랬답니다. 미련한 녀석아 그러면 학원 빠지고 미장원에 가야지 그러다가 내일 또 맞으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했더니 어차피 학교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는 미장원이 문을 닫는다는 겁니다. 내일 걸리면 그냥 맞겠답니다. 그 선생님은 걸핏하면 아이들을 때리니 그저 운에 맡긴다는 겁니다. 학교에서는 이사장 친척이거나 학교 땅 주인이라는 소문이 있다고도 합니다. 누가 제 아들에게 이사장이라는 권력을 가르쳤으며 땅주인이라는 자본논리를 심어주었습니까? 내 아이가 학교에서 권력형 비리를 배우고 자본의 뻔뻔함을 실감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아이들이 사회에 나와서 정당한 룰을 지켜나가겠습니까? 혹시 줄서기에 몰두하거나 돈의 힘만 아는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닙니까? 다음 날 아이는 웃으며 귀가했습니다. 그 선생님에게 또 걸렸는데 그 선생님 왈 “거봐라 인마, 머리 깎으니까 좋잖아?” 이러더랍니다.
선생님들은 흔히 교사의 고단함을 이야기하곤 합니다. 그 심정 얼마간 인정합니다. 일반 직장인들도 업무 중에 사람을 상대하는 분야를 최고 스트레스라고 하니까요. 그러나 냉정히 말하면 또 다릅니다. 어느 직장인들 그만한 스트레스 없겠습니까? 어딘들 속 뒤집히는 억울함과 당장 때려치우고 싶은 분노를 느끼지 않겠느냐 말입니다. 교사의 도리니, 사명감이니 낡은 기준을 고집하지 않겠습니다. 다 같은 직장인으로서 누구나 힘들다는 겁니다. 아니라고 하시겠습니까? 철없고 게으르며 예의범절까지 없는 아이들 가르쳐보라고 하시겠습니까? 예, 그런 아이를 학교에 보낸 부모라면 사죄드리겠습니다. 내 아이가 철없고 게으르며 예의범절까지 없다면 응당 이 아비가 매를 맞겠습니다. 언제든 제게 연락하시면 생업을 제쳐두고라도 학교로 달려가 엉덩이에 피가 튀도록 매질 당하겠습니다. 말로 해서 알아듣지 못하는 아들 둔 죄로 제가 짐승취급 당해도 불평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활달하던 아이가 유난히 찜부럭 부리고 낯설게 느껴진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중고교생 열에 여덟이 학교에서 체벌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 중 절대다수는 제 생각에 인성과 별반 상관없는 부분입니다. 수업시간에 떠드는 행동이나 두발 또는 복장불량이 그 아이의 불량한 인성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아이들이기 때문에 겪는 과정 아니겠습니까? 유난히 버릇없거나 지나치게 행짜 부리는 경우가 아니라면 아이들의 특성으로 인정해야 마땅하다고 생각됩니다. 떠들면 맞으니까 조용히 한다는 논리는 억압된 행동양식을 심어주는 것뿐입니다. 그 아이는 통제가 풀리는 순간 엉망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의 피새와 매질이 아이들을 시한폭탄으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선생님은 예전에 맞은 기억 없으십니까? 매 맞지 않으려고 자신을 억누르던 기억이 있으실 겁니다. 매질 당할까 두려움에 떨었던 일도 있었을 겁니다. 그 경험이 선생님을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이들을 때리면 아니 됩니다. 제발 매질만은 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사회는 감성경영이다, 펀(fun)경영이다 해서 인간의 유연한 사고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짐승처럼 매질 당하며 학교 다닌 아이들이 대학생활의 자유를 어찌 감당 해내겠습니까? 사회인으로서 자리매김 또한 엇박자가 되지 않겠습니까? 지식이나 기술의 일반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지금 학식보다 감성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또래 속에서 자율을 배우고 선후배 안에서 규율을 익혔으면 합니다. 기술력보다 디자인이 주목받는 시대에 학력보다는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들로 자라났으면 싶습니다. 아비의 이런 바람이 잘못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실례를 무릅쓰고 한 말씀 더 드리겠습니다. 선생님도 직장인이니 받은 만큼 일하려고 생각하지 마시고 받고 싶은 만큼 일하겠다는 의지를 가지면 어떻겠습니까? 그런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이셨으면 좋겠습니다. 제발 아이들은 때리지 말았으면 합니다. 우리 아이들 짐승이 아닙니다.
자식 앞에 냉정한 부모 없다더니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말을 꺼내니 만지장서(滿紙長書)가 되었고 선생님께 불만만 잔뜩 늘어놓은 것 같아 송구스럽습니다만 짐승처럼 매질 당하고 온 아들을 바라보는 아비의 심정을 조금 이해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수행평가 점수 때문에 항의도 못하고 눈물만 흘리는 제 집사람의 응어리도 헤아리셨으면 합니다. 다 같이 부모 아니겠습니까? 선생님도 금쪽같은 아이들이 있으실 텐데 남의 자식에게 매질이라뇨. 세상의 어른은 모든 아이들의 부모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짐승이 아닙니다. 열쭝이들에게 제발 매질만은 삼가시기 바랍니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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